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고 생산성이 곧바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의 잠재력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려면 조직과 업무방식, 생산 공정과 인력구조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는 1987년 “컴퓨터 시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컴퓨터가 빠르게 확산하는데도 생산성 향상이 통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현상, 이른바 ‘솔로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실마리 중 하나는 기술 도입과 함께 이뤄져야 할 조직과 생산방식의 변화다. 새로운 기술을 갖추는 것과 그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이끈 증기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 증기기관을 설치하는 것만으로 기술의 잠재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동력원에 맞춰 생산 공정과 설비 배치를 바꾸고, 노동자의 역할과 분업체계를 재구성하는 변화가 뒤따라야 했다. 기술의 효과는 이러한 ‘보완적 혁신’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ESG 경영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ESG 공시 의무화에 대비해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 경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묻게 된다. 많은 기업이 ESG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담 조직을 꾸린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고 탄소배출량을 측정하며 공급망을 평가한다. 각종 데이터를 수집해 목표와 성과를 공개하는 일은 ESG 경영의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나 제도를 갖추고 보고서를 발간하는 것만으로 ESG 경영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위원회를 설치했다고 탄소배출이 저절로 줄어드는 것도, 전담 조직을 만들었다고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이 곧바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ESG를 보고하는 일과 ESG가 기업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따라서 경영자의 질문은 보고서의 완성도에서 경영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회사는 ESG 보고서를 제대로 만들고 있는가”에 더해 “ESG가 실제로 우리의 의사결정을 바꾸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신규 사업에 투자할 때 단기 수익률과 함께 탄소비용, 환경규제, 공급망 위험을 검토하는가. 협력업체를 선정할 때 가격과 납기뿐 아니라 노동환경과 인권, 환경 위험을 살피는가. 제품을 개발할 때 원가와 성능에 더해 원료 조달부터 생산·유통·사용·폐기까지의 환경 영향을 고려하는가.
인사와 성과평가 역시 중요한 시험대다. ESG를 강조하면서도 임직원의 평가와 보상을 단기 매출과 이익에만 연동한다면 조직의 우선순위는 달라지기 어렵다. 구성원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경영자의 선언뿐 아니라 실제로 평가받고 보상받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ESG 경영의 핵심은 기업의 의사결정 체계에 환경(E)과 사회(S), 지배구조(G)의 관점을 내재화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ESG 제도 도입에 걸맞은 '보완적 혁신'이 필요하다. 전략과 투자, 구매와 공급망, 연구개발과 생산, 인사와 성과평가를 ESG 목표와 연결해야 한다. 각 부서가 업무 특성에 맞게 ESG 위험과 기회를 판단하고, 그 결과를 실행과 책임으로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기존 사업모델이 환경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즉각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듯, ESG 체계를 구축했다고 다음 분기부터 기업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가 조직에 정착하고 구성원의 행동이 달라지며 사업모델에 변화가 축적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성과 검증을 미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기 비용이나 보고서에 제시된 지표만으로 평가하기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행이 이뤄지고 있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미래 위험을 얼마나 줄였는지, 새로운 사업기회를 얼마나 만들었는지, 그 변화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ESG를 위한 ESG’도 경계해야 한다. ESG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든 활동이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사업 특성과 중요한 위험을 고려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환경·사회적 책임을 경영전략과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 ESG에 투입한 자원과 노력이 장기적인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솔로의 역설'을 ESG 경영에 비춰보면 교훈은 분명하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를 도입하는 일은 변화의 출발점이다. 성과를 얻으려면 이를 활용하는 기업의 운영방식도 함께 바꿔야 한다. ESG위원회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그 변화를 이끄는 수단이다. 위원회의 논의가 투자와 사업전략에 반영되고, 보고서의 목표가 현장의 실행과 성과평가로 이어질 때 제도는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기업이 점검해야 할 것은 보고서에 담긴 ESG 목표가 실제 경영 의사결정과 구성원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다. 목표와 실행 사이의 간극을 좁히도록 기업의 운영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 ESG 경영의 성패를 가른다.
증기기관의 잠재력이 생산방식의 변화와 함께 실현됐듯, ESG의 가치도 경영의 변화 속에서 드러난다. 보고서는 변화를 기록하고 실행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만으로 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보완적 혁신'이 기업의 운영방식을 바꿀 때 ESG는 경쟁력을 높이고, 기업가치와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힘이 된다. 결국 ESG 경영의 성과는 보고서의 완성도를 넘어, 보고서에 담긴 약속을 실행하는 기업의 변화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