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스웨덴 한림원이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의 시인 앤 카슨을 선정했다. 한림원은 그가 고전 전통과 ‘유희적 대화’를 나누며 현대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유희적 대화’는 말장난이 아니다. 익숙한 언어와 형식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사이의 차이에서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는 창조적 시도다.
카슨에게 고전은 박제된 유산이 아니다. 오늘의 질문과 만날 때 다시 살아나는 텍스트다.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괴물 게리온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새롭게 펼친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구의 자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전통을 번역하고 재구성하며 과거와 현재 사이에 해석의 공간을 여는 태도는 기업가치와 ESG의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가치 평가의 중심에는 여전히 매출과 영업이익, 현금흐름 등과 같은 전통적 재무지표가 있다. 그러나 이 숫자만으로 오늘날 기업이 마주한 위험과 기회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기후변화, 공급망의 인권·안전, 이사회의 독립성과 내부통제는 이제 비용 구조와 자본조달 여건, 성장 가능성을 좌우한다. 오늘의 재무성과가 같더라도 이런 조건에 따라 내일의 현금흐름은 달라질 수 있다.
ESG는 기존 기업가치 평가의 언어에 새로운 질문을 더한다. 카슨이 고전과의 대화로 문학의 지평을 넓혔듯, 가치평가도 재무성과와 ESG 요인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해석할 때 설명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 대화는 세 가지 관점에서 시작된다.
첫째, 재무성과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이다. 재무성과라는 결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과를 만들어 내고 지속시키는 조건을 살펴야 한다. 탄소배출량과 산업재해율, 인적자본 등은 재무와 동떨어진 별도의 성적표가 아니라, 기업의 비용과 위험, 생산성과 성장을 이해하는 단서다. 중요한 것은 지표 자체의 높고 낮음만이 아니라, 그 변화가 어떤 경로를 거쳐 재무성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읽어 내는 일이다.
이사회 독립성과 내부통제의 질 역시 재무성과를 해석할 때 함께 살펴야 한다.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적절히 견제하고 자본배분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다만 ESG 지표와 재무성과의 관계는 산업과 사업모델에 따라 다르다. 같은 수준의 탄소배출량이라도 규제 강도와 감축 여력에 따라 재무적 영향은 달라진다. 따라서 ESG 지표는 기업이 처한 사업 환경과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가치를 다시 읽는 일이다. 친환경 설비나 안전한 근로환경에 대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비용을 늘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에너지 비용과 사고 위험을 낮추고 규제 변화에 대응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 당장의 지출만 보면 부담이지만, 미래 현금흐름까지 시야에 넣으면 판단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장기 편익을 막연히 기대해서도 안 된다. 태양광 설비 투자라면 초기 투자액과 전력 구매비 절감액, 유지관리 비용, 투자 회수 기간을 함께 따져야 한다. 전력 가격이나 설비 수명 같은 핵심 가정이 바뀔 때 경제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ESG 투자의 가치는 투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투자가 미래 현금흐름과 위험을 얼마나 개선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 가치창출 방식의 재설계다. 오늘날 기업가치는 내부의 자산과 역량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객, 임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와 맺는 관계도 장기 경쟁력을 좌우한다. 신뢰와 조직문화, 공급망의 회복탄력성은 재무제표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지만 지속적인 가치창출을 떠받친다. 카슨이 괴물의 관점에서 신화를 다시 써 내려 갔듯, 기업도 이해관계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가치사슬을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협력업체의 안전과 인권을 관리하는 체계는 공급 차질과 평판 위험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그 효과는 핵심 부품의 대체 공급처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공급 중단 이후 생산이 정상화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등을 통해 점검할 수 있다. ESG는 이러한 관계를 경영전략과 자본배분, 위험관리에 반영하도록 한다.
세 관점은 서로 맞물린다. 재무성과를 바라보는 관점을 넓히면 보이지 않던 위험과 기회가 드러나고, 시간의 관점을 더하면 그 영향이 실현되는 조건이 보인다. 가치창출 방식을 다시 들여다보면 미래 현금흐름을 만들어내는 구조까지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검증이다. 안전 프로그램을 도입한 뒤 사고와 결근이 줄었다면, 같은 기간 생산량이나 인력 구성의 변화도 함께 봐야 한다. 회사채 발행금리가 낮아졌더라도 신용등급과 만기, 시장금리의 영향을 걸러내지 않고 이를 ESG 성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비교 가능한 기준과 합리적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비용과 편익을 함께 따져야 한다.
아울러 기업가치에 영향을 주는 ESG 요인과, 기업이 사회·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구분해야 한다. 둘은 연결되어 있지만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활동이 곧바로 재무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재무적으로 유리한 선택이 언제나 사회·환경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이 간극을 인정하고 각각의 영향과 연결 경로를 살피는데서 실질적인 평가가 시작된다.
기업가치와 ESG의 ‘유희적 대화’란 결국 익숙한 숫자가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놓치는지 묻는 일이다. 과거의 성과를 기록한 숫자에서 출발해,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위험을 어떻게 관리하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살피는 과정이다.
앤 카슨의 문학이 고전을 오늘의 질문으로 다시 읽듯, 기업가치 평가도 재무성과를 변화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새롭게 읽어야 한다. ESG는 이러한 읽기를 돕는 또 하나의 언어다. 이 대화가 깊어질수록 기업가치 평가는 표면적인 판단을 넘어, 새로운 정보와 지속적인 검증을 통해 더욱 정교한 분석으로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