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ESG 정책 기조와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성 규제 완화 움직임은 글로벌 ESG 정책이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ESG를 경쟁적으로 확대하던 시대에서 기업 부담과 산업 경쟁력을 고려해 속도와 방식을 조정하는 시대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업이 ESG를 왜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말 ESG가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ESG를 지나치게 짧은 시간과 단순한 수익률의 잣대로 평가해 온 것은 아닐까.
경제·금융 분야에서는 자본의 성격에 따라 '모험자본(Venture Capital)'과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을 구분해 쓴다. 모험자본은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자본이고, 인내자본은 단기 성과보다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과 지속가능한 기업가치 창출을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자본이다. 혁신 생태계가 건강하게 굴러가려면 이 두 자본이 균형 있게 공급돼야 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ESG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탄소저감 기술, 수소경제, 재생에너지처럼 실패를 감수해야 하는 혁신 분야도 ESG에 포함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ESG의 본질은 신기술 투자 자체가 아니라 기업이 미래에도 살아남을 경쟁력을 축적하는 데 있다. 오히려 초기에는 당장 이익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비용 증가와 수익성 악화라는 비판에 시달리기 쉽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양상은 달라진다. 기후 규제 대응력이 높아지고 산업재해와 법적 분쟁이 줄어들며 공급망 리스크가 완화되고 소비자와 투자자의 신뢰가 쌓인다. 이는 자본조달 비용을 낮추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며 장기적으로 기업가치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ESG는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라기보다 시간을 투자하는 경영에 가깝다. ESG에는 모험자본보다 인내자본의 성격이 강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ESG는 인내자본을 필요로 하는 장기 경영전략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시장에는 수익 극대화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촉매자본(Catalytic Capital)'이 존재한다. 더 높은 위험을 먼저 감수하거나 양보적인 조건으로 투자해 후속 상업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자본이다. 이런 자본을 일반 상업 투자자본과 같은 잣대로 놓고 단기 수익률만 비교하면 임팩트 투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ESG 경영에도 이 개념이 필요하다. 기업 내부에서 ESG에 먼저 투입되는 자본은 일종의 '인 하우스 촉매자본'이다. 탄소감축 설비, 안전 시스템, 친환경 기술, 공급망 개선, 인재 육성, 지배구조 혁신에 선제적으로 투입한 자본이 곧바로 높은 수익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선행 투자는 기업의 위험을 낮추고 기술·사업의 가능성을 검증해, 외부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안심하고 뒤따라 자본을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예컨대 기업이 자체 자금으로 탄소저감 기술을 개발해 실증사업을 시작하면 초기 비용 부담은 커지지만, 기술과 사업성이 검증되면 정책금융·녹색금융·기관투자자·민간자본이 뒤따라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최초의 ESG 투자가 더 큰 외부자본을 움직이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 하우스 촉매자본이 중요한 이유다. ESG 투자의 성과는 최초 투자금이 얼마의 직접수익을 냈느냐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투자가 얼마나 많은 후속 투자와 혁신을 유도하고, 기업의 위험을 낮추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는지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ESG 경영의 역할도 달라진다. ESG 부서는 보고서를 만들거나 평가기관 점수를 관리하는 조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제한된 자본을 어디에 먼저 투입해야 더 큰 변화와 후속 투자를 이끌어낼 것인지 판단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재무부서 역시 ESG를 단기 투자수익률이 낮더라도 기술혁신·사업전환·위험관리·외부자본 유입을 촉진하는 '전략적 촉매자본'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세계 주요 연기금과 국부펀드들은 분기 실적뿐 아니라 장기적 지속가능성과 위험관리 능력을 중요한 투자 기준으로 삼는다. UN PRI(유엔 책임투자원칙)는 ESG 요소를 투자 의사결정에 반영하도록 하고, 각국의 스튜어드십 코드 역시 기관투자자가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수탁자 책임을 적극 이행하도록 요구한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공시기준을 마련하고 우리나라도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를 중심으로 공시체계를 정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기업 이미지 관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현금흐름과 기업가치를 가늠하는 핵심 정보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ESG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는 다소 줄어드는 분위기지만, 기후변화 대응·지속가능성 공시·공급망 실사·인권 보호·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ESG라는 이름과 정책의 속도는 달라질 수 있어도 지속가능경영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경영의 본질은 오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일도 존속할 기업을 만드는 일이다. ESG는 단기 수익률을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래의 현금흐름과 기업 가치를 키우기 위해 오늘의 비용을 감내하는 전략적 투자이며, 때로는 더 큰 민간자본과 혁신을 끌어들이는 촉매가 돼야 한다.
지금 우리 기업에 필요한 것은 ‘경로의존성’이라는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먼저 만드는 ‘미움 받을 용기’다. ESG 경영은 그 길을 만들어 미래의 자본과 혁신을 불러들이는 촉매자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