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재무성과만이 아니다. 오늘날 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냈는가보다, 그 이익을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내고 누구와 어떻게 나누며 어떤 원칙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가에 의해 평가받고 있다.
ESG 시대에 지배구조는 단순한 경영관리 수단을 넘어 기업의 신뢰와 시장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이자 지속가능성의 토대다. 그러나 한국 자본시장이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지금, 지배구조의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선진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며 변화에 대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절반이 넘는 기업들은 기본적인 견제와 균형 장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과거 관행에 머물러 있다.
한스경제 인사이트랩이 코스피 상장사 791개사(비금융)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전수조사 결과는 이러한 격차를 수치로 보여준다. 올해부터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 의무가 자산 규모 기준 없이 코스피 전체 상장사로 확대되면서, 그동안 자산 5000억원 미만이라는 이유로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던 중소형 상장사들까지 처음으로 동일한 기준 아래 평가받게 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가려져 있던 기업 간 거버넌스 수준의 격차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791개사 가운데 15개 핵심지표를 모두 충족해 준수율 100%를 기록한 곳은 단 6개사(0.8%)에 불과했다. 준수율 90% 이상 기업까지 포함해도 19개사(2.4%)에 그쳤다. 반면 준수율이 50%에도 못 미친 기업은 435개사로 전체의 55.0%를 차지해 평균 준수율을 47.8%로 끌어 내렸다. 6개사의 완벽한 준수와 435개사의 절반 미달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는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현주소가 '모범기업의 소수화'와 '미흡기업의 다수화'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양극화는 기업 간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15개 핵심지표 사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경영 관련 중요정보에 감사기구가 접근할 수 있는 절차(93.7%), 회계·재무 전문가의 내부감사기구 포함(80.4%), 전자투표 실시(76.5%)처럼 비용부담이 적고 제도 도입이 상대적으로 쉬운 항목은 높은 준수율을 기록했다
반대로 사외이사의 이사회 의장 선임(11.3%), 집중투표제 채택(4.4%), 최고경영자 승계정책 마련(28.8%)처럼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일정한 권한을 내려놓아야 하는 항목은 준수율이 현저히 낮았다. 가장 높은 지표와 가장 낮은 지표의 차이는 89.3%포인트에 달한다. 결국 기업들이 ‘도입하기 쉬운 제도’에는 적극적이지만, ‘권한을 나누는 제도’에는 소극적이라는 의미다.
부문별 분석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감사기구 부문 평균준수율이 65.4%로 가장 높았고 주주 부문은 50.9%를 기록했다. 반면 기업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 부문은 33.5%로 가장 낮았다. 이는 지배구조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 기능이 가장 필요한 영역에서 오히려 개선이 가장 더디게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형식적인 제도 도입은 늘었지만 실질적인 권한 분산과 독립성 확보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다.
실제로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기업은 전체의 11.3%에 불과했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는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견제 장치로 평가받지만,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독립성보다 의사결정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이다.
소수주주 보호를 위한 핵심 제도인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기업은 35개사(4.4%)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정 상법에 따라 2026년 9월 10일부터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사가 정관으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것이 제한된다. 자율에 맡겨졌던 제도가 법적 의무로 전환되는 셈이다. 그러나 시장이 지금까지 보여준 자발적 채택률이 4.4%에 그쳤다는 사실은 K-지배구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수주주 권익보호보다 경영권 방어를 우선시해 온 기업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주주 부문에서도 ‘쉬운 지표’와 ‘어려운 지표’의 양극화는 반복된다. 전자투표(76.5%)와 주주총회 분산 개최(71.4%)는 비교적 높은 준수율을 보였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궁금해 할 현금배당 예측가능성 제공(40.5%)과 배당정책의 연1회 이상 통지(34.8%)는 모두 50%를 밑돌았다. 정부가 ‘선(先)배당액 확정, 후(後)배당기준일 지정’ 제도로 배당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 하는데도, 기업들의 수용 속도는 더디다.
감사기구 부문 역시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중요정보 접근 절차 마련(93.7%)과 회계·재무 전문가 포함(80.4%)은 높은 수준을 보였지만, 감사기구의 실질적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독립 내부감사부서 설치율은 40.8%에 그쳤다. 외형적 요건은 갖췄지만 실질적 운영 체계는 부족한 이른바 ‘박스 체크(Box Check)’형 준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변화의 흐름도 감지된다. 신설된 이사회 다양성 확보 지표는 45.8%, 위험관리 및 내부통제정책 마련은 61.7%를 기록하며 비교적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최근 상법 개정 과정에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확대, 독립이사 비율 강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이 추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지배구조가 자동으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이 여전히 ‘법적 의무의 최소한만 충족 하겠다’는 태도에 머문다면 양극화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미준수 사유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검토 중’, ‘효율성 고려’, ‘향후 추진 예정’이라는 문구는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SG의 본질은 환경(E)과 사회(S)를 떠받치는 지배구조(G)에 있다. 코스피 10000 시대를 말하면서 791개사 중 435개사가 지배구조의 기본 문턱조차 넘지 못한 현실을 외면한다면, 그 성장은 모래 위에 세운 성과와 다를 바 없다.
핵심지표를 모두 준수한 6개 기업과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435개 기업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를 높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