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美·이란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러⸱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는 안보와 지정학 충돌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공급망은 흔들리고 에너지·원자재 시장은 요동치며, 각국 정부와 기업은 생존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조용하지만 훨씬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주주이익 극대화를 절대 기준으로 삼던 전통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고객·직원·협력사·지역사회·환경까지 함께 고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과 자본이 흘러가는 방향, 나아가 기업이 생존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변화는 각종 제도와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ESG 정보공시는 세계 주요 시장에서 의무화 단계로 접어들었고, 지속가능성 이슈는 재무정보와 연결되며 기업가치 평가의 핵심 변수로 편입되고 있다.
올해부터 본격 시행된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탄소배출을 실질 비용(톤당 75유로 수준)으로 공식화했다. 기후 위험은 투자 리스크가 되고, 인권과 노동기준은 공급망 거래조건이 되고 있다. 환경과 인권이 통상의 언어로, 지속가능성이 회계와 자본의 언어로 번역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업들은 과거의 경영방식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새로운 게임의 룰 앞에 서 있다. 단기 실적만 좇고 외부비용은 사회에 전가하며, 지배구조 문제를 내부 사안으로 치부하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ESG는 선택 과제가 아니라, 바뀐 패러다임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 됐다.
기업들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ESG 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담 조직을 꾸렸으며,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는 한편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내부통제, 준법감시 체계 정비 등에 나서고 있다.
겉으로는 대전환이 시작된 듯 보인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평가는 냉정하다. 형식은 갖췄으나 실질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ESG를 여전히 조직 신설과 제도 정비에 머무는 하드웨어적 과제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힘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본력·기술력·생산설비·시장점유율·재무건전성처럼 손익과 현금흐름, 수익성으로 확인되는 재무성과 기반의 하드 파워다. 다른 하나는 고객 신뢰·브랜드 평판·윤리경영·혁신문화·이해관계자와의 협력 역량처럼 당장 숫자로 완전히 드러나진 않지만, 장기적 기업가치와 프리미엄을 만드는 비재무성과 기반의 소프트 파워다.
하드 파워 강화에는 익숙했지만, 소프트 파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해 왔다. 시장 신뢰 훼손과 환경 리스크, 노사 갈등, 지배구조에 대한 불신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큰 비용을 초래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반대로 소프트 파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좋은 이미지와 선한 메시지만으로 기업은 성장할 수 없다. 기술 경쟁력과 재무 안정성, 강한 실행 역량이라는 하드 파워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생산능력이 뛰어나도 환경규제를 무시하면 경쟁력을 잃고, 수익성이 높아도 지배구조가 불투명하면 시장은 기업가치를 할인한다. 브랜드가 강해도 노동·인권 문제가 반복되면 소비자는 등을 돌린다. 하지만 우수한 기술력과 자본력 위에 신뢰와 투명성이 결합되면 기업가치는 합산 이상의 시너지를 낸다.
ESG 시대에는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결합한 ‘스마트 파워’가 새로운 승자의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ESG 경영의 본질인 지속가능성이 드러난다. 지속가능성은 두 힘을 단순히 더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 결합을 통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쟁력의 구조다.
하드 파워라는 재무성과와 소프트 파워라는 비재무성과가 서로를 증폭시키며, 합보다 더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 전략이 곧 스마트 파워다. 다시 말해 “스마트 파워 > 하드파워 + 소프트파워”라는 부등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산업화 시대에는 공장과 설비, 시장점유율, 자금력이 기업의 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은 숫자만 보지 않는다. 공급망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환경 변화에 얼마나 선제적으로 대응하는지, 이해관계자와 어떤 신뢰를 쌓고 있는지, 위기 속에서도 얼마나 투명하게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함께 평가한다.
ESG 시대의 승자는 더 강한 기업이 아니라, 더 똑똑하게 강한 기업이다. 하드 파워에 소프트 파워를 결합해 스마트 파워로 전환한 기업만이 기업 가치를 높이는 시너지를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