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스경제=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지난달부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은 국내 관람객에게 가장 친숙한 인상주의의 출발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상주의는 널리 사랑받는 화풍이지만 그 기원은 사실 전통적 회화 규범을 과감히 벗어나 빛의 변화와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려는 혁신적 실험에서 비롯됐다.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색채의 떨림, 흐릿하게 풀리는 경계, 순간적 감각의 표면을 포착하는 능력은 인상파 회화의 매력이었지만 동시에 분명한 한계도 내포했다. 찰나에 몰두한 만큼 사물이 지닌 구조·무게·지속성은 충분히 드러나기 어려웠다.
이 한계를 가장 깊이 파고든 인물이 바로 폴 세잔이다.
그는 “자연을 원통과 구, 원뿔로 보라”는 선언으로 시각적 인상의 집합을 거부했다.
세잔에게 세계란 한 지점에서 포착된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라, ‘다시점’에서 드러나는 사물 내부의 질서·구조·균형이 교차하며 형성하는 본질적 실재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 너머에 자리한 더 깊고 견고한 구조를 복원하고자 했던 화가였다.
이러한 세잔의 집요한 탐구는 결국 “사과는 왜 사과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표면적 인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이 사물일 수 있게 하는 본질적 구조와 질서를 ‘사과성’이라는 개념으로 끌어올렸다.
세잔의 사과는 단순한 정물의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거리·조명 속에서 드러나는 다층적 속성을 종합해 복원한 본질의 형상이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기업이 맞닥뜨린 ESG 정보공시의 과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기업 경영은 더 이상 단순 재무지표나 주주라는 단일 이해관계자의 요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국면에 들어섰다.
환경(E)·사회(S)·지배구조(G)를 둘러싼 정보는 투자자, 공급망, 규제 당국, 고객,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각기 다른 관점과 기대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즉 ESG 정보는 특정 시점에 고정된 단면이 아니라 다중 이해관계자의 시각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다시점’ 정보다.
단일 프레임에 갇힌 숫자나 지표만으로는 기업의 본질적 구조와 리스크,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업의 미래 지속가능성을 관통해 보여주는 하나의 프리즘이 바로 ESG 정보공시다.
그렇기에 ESG 정보공시는 더 이상 ‘겉으로 보이는 경영 활동을 나열하는 보고서’ 수준에 머물 수 없다.
세잔이 순간의 인상을 넘어 사물의 구조를 복원했듯, 기업 역시 환경·사회·지배구조를 구조화한 내부체계와 리스크 관리 수준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시 역량을 갖춰야 한다.
최근 ESG를 둘러싼 논쟁과 시장 환경의 변화, 일부 규제 완화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정작 투자자·고객사·소비자 등 주요 이해관계자의 정보 요구는 더욱 구체적이고 강화되는 추세다.
실제로 지속가능성 보고서의 외형과 형식은 빠르게 정교해지고 있다. 다양한 공시지표와 국제 표준이 적용되면서 보고서의 분량은 늘고, 시각적 완성도 역시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기업의 경영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내적 전환으로 이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ESG 정보공시의 ‘다시점’이 조직의 내부 시스템·리스크 관리·의사결정 구조에 실질적으로 내재화되지 않는 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결국 일회성 문서를 넘어서지 못하고 또 하나의 홍보성 작업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숫자의 인상주의를 벗고 기업의 본질을 다시 구성하려는 새로운 시선이다.
세잔이 ‘사과성’을 끝없이 탐구하며 현대 미술의 구조적 기반을 세웠듯 지속가능성 보고서는 단순히 ESG 경영을 기록하는 산출물이 아니라 조직 전반의 체계를 고도화하는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ESG 정보공시가 요구하는 것은 표면적 이미지나 ‘보여 주기식’ 성과가 아니다.
기업이 책임 있게 기능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지배구조의 투명성, 환경·사회적 책임 이행의 진정성, 리스크 관리체계의 견고함, 데이터의 일관성과 신뢰성, 그리고 전략과 실행의 정합성이야말로 ESG 공시의 핵심이다.
결국 ESG는 인상주의적 ‘한순간의 빛’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다.
찰나의 인상을 좇는 감각을 넘어 사물의 구조와 질서를 끝내 복원해내려 했던 세잔의 ‘다시점’처럼, 통합적 데이터와 지표에 기반 한 구조적 경영체계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ESG 정보공시는 기존의 재무중심 경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목적과 가치를 지속가능성의 구조 속에서 재정렬하는 확장된 시도다.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기업의 본질적 가치는 더 이상 재무정보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
ESG 요소가 조직과 시스템 깊숙이 스며들어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기업의 지속가능성이 구조적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잔이 던진 “사과는 왜 사과인가-사과성?”라는 본질 탐구의 물음은 ESG 정보공시를 앞둔 오늘의 기업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