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깨달아야 삶을 개척하고 가치있게 살려 노력"
"'장수'에 걸맞는 철학과 문화 있어야…죽음에 좀더 성숙한 접근"
[한스경제/ 이찬규 중앙대 부총장]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수명에 비례해서 늙고 병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여기저기 늘어만 가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을 보라. 그러다 보니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의지는 강하나 이런저런 제약이나 현실적인 문제로 그야말로 우물쭈물하다가 추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도달하고야 만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사회도 이 ‘죽음’이라는 것을 공론화하고 장수 사회에 걸맞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금기시만 하지 말고 곳곳에서 이에 대한 활발한 담론이 펼쳐져야 한다. 철학이나 문화는 건강한 젊은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아픈 사람이나 기력이 부족한 노인들에게 더 필요할 수 있다. 단지 안락사나 존엄사를 인정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한 개인의 삶이나 우리 사회 전체에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미 역사적으로 많은 현자들이 ‘죽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삶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변해 왔으므로 참고할만한 자료는 얼마든지 넘쳐난다.
단테의 ‘신곡’도 죽음 후를 통해 삶을 보는 이야기이며, 프랑스 유명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며 쓴 자전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은 죽음 앞에서 평온과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궁극적 사건이 ‘죽음’이라고 보았고, 그에 영향을 받은 니체는 더 나아가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개념을 통해 죽음조차도 능동적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이 점은 동양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노자는 죽음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일부로 보는데, 이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흘러가는 대로 두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뜻한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집착하고 노력하는 대신, 자연의 흐름을 따라 그것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도의 길이라고 여겼다. 장자는 더 나아가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개념을 강조했는데, 이는 삶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의미로서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연속일 뿐이며, 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라는 말은 씁쓸하다. 평생 살면서 누리지 못한 평등을 죽음을 통해 얻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결국 ‘죽음’이라는 뜻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진리’는 그 소멸적 특성 때문에 인간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지만 어쨌든 삶의 한 부분이며, 누구나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가 있다. 사실 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전 단계인 ‘삶’의 질이 달라진다. ‘죽음에 대한 태도’가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 멋대로 살자’나 ‘죽는 순간 후회없도록 최선을 다해 살자’를 결정해주는 선택 기준이 바로 ‘죽음’에 대한 태도이니, 바꾸어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건강한 태도가 건강한 삶을 만드는 셈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암 투병 중인 1987년 어느 가을날, 평소 알고 지내던 천주교 박희봉 신부에게 24가지의 질문이 담긴 다섯 페이지 분량의 질문지를 건넸고, 그는 이것을 정의채 신부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그 답을 듣지 못하고 그해 11월 임종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고뇌했던 것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가 아니고, 신의 존재나 죽음의 문제였다. 나중에 김용규 철학자가 이에 대한 답으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책을 내기는 하였지만, 이병철 회장께서 좀 더 일찍 이 질문지를 보내서 대답을 듣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 질문과 답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였던 쿠블러 로스(Kubler Ross)는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보이는 반응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죽음에 임박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숭고한 삶’을 정리할 시간도 가질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답을 찾기에도 너무 늦다.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깨달아야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해지며, 삶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쉽게 ‘욕망을 향한 집착‘에 빠진다. ’당신은 곧 죽을 건데 지금 무얼 할 건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가 ’방종‘을 선택한다면 그는 수십만년 동안의 진화로 마침내 ’영혼‘이라는 고귀함을 지니게 된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짐승으로 사는 것과 같다. 온갖 교활함으로 타인을 속이고, 타인을 억압하는 행위를 일삼는 자들도 ’죽음‘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낳은 괴물들이다. 죽음의 순간, 인간은 가장 진실되고 경건해 질 수 있으니 그 시점으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지에서 뒤를 돌아보니 당신이 걸어온 길은 안전하고 편안한 도로였다고 위안을 삼을 텐가? 누군가가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여겨온 그 길이 사실은 오물로 뒤덮인 더러운 길이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항변할 텐가?
인생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5단계로 본다면, 죽음은 ‘마지막’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결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숭고함’이 지니는 극적 효과로 인해 오히려 ‘절정’에 해당하며, ‘결말’은 그 절정 후에, 남은 사람들이 이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결말까지가 인생이라고 본다면 나는 절정을 통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그 역순으로 ‘위기’의 순간에도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을 돌파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건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온종일 건강만을 생각하며,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온갖 영양제를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 대로 행복을 개척하며 뚜벅뚜벅 죽음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초인(Übermensch)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죽음에 대해 깨달아야만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가며 가치있게 살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니 결국 ‘죽음’에 대해 고뇌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며, 그것이 건강한 삶을 만드는 에너지원이 되는 셈이다.
"장수는 미덕이다(Longevity is virtue)"라는 말은 누구나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성립되는 격언이다. 이 말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에게 ‘장수’가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철학과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더라도 그 안에 성찰과 문화가 있다면 미덕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건강한 삶조차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이제 ‘죽음’에 대해 논의할 때, 단지 ‘존엄사’를 합법화하는 법제도의 관점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좀 더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죽음’의 참 의미를 깨달아 가는 담론과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문학의 완성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다.